무료 시 모음
새해 아침/백수인
새해 첫 아침에 산길을 오른다.
아직 지지 못한 하얀 달이 서쪽 하늘에 걸려 있다.
뒤돌아보면 그 달이 자꾸만 따라온다.
손사래를 쳐도 또 따라온다.
가 정/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갈대/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성탄제/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들풀/권영상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파득파득
구겨진 잎을 편다.
작은 들꽃/조병화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나 나나 이 세상에선
소유할 것이 하나도 없단다
소유한다는 것은 이미 구속이며
욕심의 시작일 뿐
부자유스러운 부질없는 인간들의 일이란다
넓은 하늘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소유라는 게 있느냐
훌훌 지나가는 바람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애착이라는 게 있느냐
훨훨 떠가는 구름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미련이라는 게 있느냐
다만 서로의 고마운 상봉을 감사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존재를 축복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인연을 오래오래
끊어지지 않게 기원하며
이 고운 해후를 따뜻이 해 갈 뿐
실로 고마운 것은 이 인간의 타향에서
내가 이렇게 네 곁에 머물며
존재의 신비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짧은 세상에서
이만하면 행복이잖니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는 인간들이 울며불며 갖는
고민스러운 소유를 갖지 말아라
번민스러운 애착을 갖지 말아라
고통스러운 고민을 갖지 말아라
하늘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대지가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구름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잠시 눕는 풀/장석주
풀은 조용하다.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뿌리의 정적 쪽으로
마음을 눕히고 풀은 조용하다. 바람은
흐린 하늘을 쓴 소주처럼 휘저으며
벌판을 들끓는 아픔으로 흔들며
온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과
흔들며 지나가는 것 사이의
긴장은 고조된다. 시간은
어디론가 숨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바람은 오고
잠시 풀은 눕고,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의
풀은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눕히지만
끝내 바람은 흙 속에 숨은
풀의 흰 뿌리를 흔들지 못한다. 종일을
빈 벌판은 푸른 모발을 날리며
엎드려 있고 종일을 빈 벌판은
통곡을 하며 엎드려 있고
또 다시 바람은 불어오고
풀은 잠시 눕고 다시 풀은
일어서며 풀은 조용하다